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노다 히로오 (문단 편집) == 일본 패전 전까지의 이력 == 오노다는 [[1922년]], [[와카야마현]] 가이소군 가메가와촌[* 現 와카야마현 가이난시.]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. [[구제중학교]] 졸업 후에 민간 무역 회사에 취직하면서 [[중국어]] 등을 습득하였다고 한다. 이때 이미 다른 형제들은 전부 군사 학교 등을 졸업하고 [[일본군]] 장교가 되었으며,[* 당시는 슬슬 [[일본 제국]]의 [[군국주의]]화가 급속화되던 시절이라 제대로 된 학교를 나와서 장교로 임관한다는 것은 출세의 지름길, 즉 엘리트 코스 중 하나였다.] 그 와중에 혼자 민간회사에서 일한 덕분에 오노다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큰 관심을 못 받았다. 그러던 도중 [[1942년]] 12월에 [[징병검사]]를 받고 보병 61연대(보병 218연대로 소속 변경됨) [[이등병]]으로 입대하게 된다. 여기서 [[갑종간부후보생]]에 합격하여 [[1944년]] 1월 육군예비사관학교에 입학했다. 과거 무역 회사 일을 하면서 배운 [[영어]]와 [[중국어]] 실력을 바탕으로 육군 [[나카노 학교]][* 첩보교육기관이었는데 오노다 히로오가 입학할 때 유격전 학교인 '후타마타 분교'가 생겼다. 오노다도 후타마타 분교 출신]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 견습 사관을 거쳐 소위 계급으로 임관하게 된다. 이후 [[1944년]] 12월 14방면군에 배속받았다. [[12월 26일]]에 타니구치 요시미(谷口義美) 소좌의 인솔 아래 오노다 소위는 자신과 같은 [[나카노 학교]] 졸업생 5명과 함께 첩보 및 유격전을 담당하기 위해 [[마닐라]] 외곽 군기지에 주둔했던 제8사단(사단장이었던 요코야마 시즈오)으로 파견된다. 이때 오노다 소위는 민도로섬 북서쪽에 위치한 루방섬에서 정보 수집과 유격전을 담당했는데, 특히 부두 시설과 비행장을 [[미군]]이 사용하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. 한편 요코야마 시즈오 사단장에게 다음과 같은 훈시를 받기도 했다. > '''[[옥쇄]]는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. 3년이건 5년이건 버텨라. 반드시 지원을 가겠다. 그동안 병사가 한 명이라도 살아있으면, [[야자수]] 열매라도 따먹으면서 버텨라. 다시 말하지만, 옥쇄는 용서하지 않는다.''' [[http://www.poweroftruth.net/column/mainView.php?icat=&table=c_booking&uid=116|#]] 일본군 교리는 항복은 치욕이니 [[옥쇄]]하라는 교리였으며, 옥쇄는 해당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냥 [[자살]]이었으므로, 훈시 내용은 '자살하지 말고 구조될 때까지 버티라'는 매우 상식적인 것이었다.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상식적인 훈시 때문에 후술할 참극을 일으켰다. 루방섬에는 [[일본군]] 200명이 있었는데 [[일본육군|육군]], [[육군항공대]], [[일본해군|해군]]으로 각자 소속과 부대가 달랐으며 더욱이 지휘하던 장교들이 따로 있었다. 이에 오노다 소위가 이들을 지휘할 수 없었으며, 자신이 받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비행장을 파괴하자는 조언을 하자 장교들은 일본군이 나중에 공중 우위를 되찾으면 이 비행장이 다시 필요하게 될 수 있다며 반대하였다. 결국 비행장 파괴는 실패하였고 [[필리핀 탈환전]]의 일환으로 [[미군]] 상륙 후 3월 중순까지 장교들이 다 죽고 자신만이 유일한 장교로 남은 후에야 지휘권을 잡을 수 있었으며 이때 루방섬에 남은 일본군은 30여 명이었다. 오노다는 추격을 피하기 위해 병사들을 더욱 작은 그룹으로 나누었는데, 4월 하순 약속된 장소에서 만날 수 있던 병사가 시마다 쇼이치 오장이며 일주일 후 만난 게 고즈카 긴시치 일등병이었다. 그리고 이들은 미군을 피해 섬 안쪽인 산 속으로 패퇴했다. 그 와중에도 그들은 반쯤 [[게릴라]]화되어서 국지전을 계속 벌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